#84

Which hill

어느 언덕

2025.11.26 ~ 2025.12.09

작가ㅣ정승규

음악, 사운드ㅣ임승택

미디어 대여ㅣ강동호

설치 도움ㅣ엄정섭

주최, 주관ㅣ정승규

후원ㅣ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번 전시에서 정승규는 아베 코보(1924–1993)의 소설 『짐승들은 고향을 향한다』(1956)에서 영감을 얻은 애니메이션을 선보인다. 아직 한국에 소개되지 않은 이 소설은 만주국이 1945년, 일제 패망과 함께 붕괴된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소설 속에선 만주에서 태어난 일본인 청년 쿠조가 일본으로 향하는 여정이 그려진다.


식민주의 붕괴 후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국경이 재편성되고 민족적, 정치적 이념이 전면화되는 상황을 마주한다. 소설 속 배경이 된 시공간 또한 명확하게 구획되지 않은 장소다. 어제는 공산당이 통제했던 마을을 내일은 국민당이 통제한다. 고정된 경계도 부동한 정체성도 있을 수 없는 상태적 시공간 속에서, 모든 인물은 경계 위에 선 짐승이 된다.


그러나 경계가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언덕》은 구체제와 신체제 사이 잠시 존재했던 ‘해방기’라는 시공간을 경유하여 가상의 무대를 제시한다. 이 무대는 국경과 경계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유동적인 지반으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같은 땅으로, 부서지고 다시 쌓이는 모래 언덕의 이미지로 암시된다. 전시는 이 흔들리는 땅 위에 선 주체들의 ‘위태로운 상태’가 확고부동을 이상으로 두는 시스템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정승규는 일렁이는 땅 위에 서 있는, 혹은 떠 있는 어떤 존재들을 불러온다. 이들은 고향을 향한 시를 읊으며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마치 설화에서 나온 것 같은 이들은 그 자체로 ‘고향 없음’과 ‘떠돎’을 은유한다. 이 꼭두각시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기만과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닿을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고 진동하며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정승규

정승규는 동아시아 지역의 근대성과 역사적 맥락을 자신의 신체적 행위로 축소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다양한 경로의 리서치와 참조, 글쓰기를 통해 본인과 외부를 잇는 이야기를 구성하고 역사와 기억, 과거와 현재, 실재와 허구를 엮어낸다. 행위성은 영상, 퍼포먼스, 드로잉, 설치 등 신체가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매체 속에서 드러난다. 자신의 크기로 제한된 결과물이 다시금 어떻게 외부와 연결되고, 나아가 예상치 못한 지점을 드러내는지 관심을 둔다.


*본 전시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25년 청년예술가도약지원>을 통해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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