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가는 게 아니라 변화가 필요한 거야. 나도 전엔 음식에든 삶에든 의욕이 있었어. 근데 이젠 아냐, 뭔가 색다른 곳에 가고 싶어!”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lay Love> 중에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기억하나요?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가 서른한 살의 성공한 저널리스트 ‘리즈’를 연기한 이 영화는 엘리자베스 길버트라는 작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죠. 

안정적인 직장과 남편, 맨해튼의 아파트를 모두 포기하고 주인공 리즈는 1년 간 여행을 떠나며 영혼을 온전히 회복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어느덧 고전이 된 영화 속 리즈에게 다가왔던 공허한 허기와 삶의 무용함'이 

저한테도 훅~ 파고들어 오더군요. 그래서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그래, 도망치는 게 아니라 변화가 필요한 거야!' 고작 10일 남짓한 일정이었지만, 물 위의 도시 베니스로 향했죠.

중세에는 예루살렘의 성지순례 코스이자 18세기에는 엘리트들의 인생 여행지였고, 지금은 섬 전체가 거대 미술관으로 변모한 21세기 미술 여행의 성지로 말이에요. 달콤한 게으름을 위해, 예술의 향연을 만끽하기 위해!


from 디렉터 김정은 

 

“한국을 뜨겠습니다????” 올해 베니스에 가야만 하는 이유

수많은 관광 수식어가 붙는 베니스에는 격년마다 ‘미술계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La Biennle di Venezi)가 열려요. 올해는 유난하게도 전 세계에서 이 행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죠. 

무려 129년이 지난 60주년이 된 해이거든요. 1895년, 제국주의 시대 만국박람회 모델로부터 시작해 오늘날 동시대 예술 실험의 각축장으로 견인되기까지, 1∙2차 세계대전과 팬데믹을 제외하면 ​이 국제 행사는 

2년마다 꾸준히 열렸다고 해요. 전시 기간도 상당히 긴 편이죠. 4월에 개막해 11월까지, 7개월 동안 열리거든요. 그렇게 매번 몰려드는 관람객만 80만 명 이상이 육박한다니 정말 대단하죠?


비엔날레의 원류, 베니스

섬 전체가 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베니스라고 해도, 비엔날레를 진짜 경험하고 싶다면 카스텔로 공원과 아르세날레 전시장 일대를 가야 해요. 옛 국영 조선소이자 무기고였던 아르세날레에는 본전시가, 자르디니 공원에는 20세기 초 강대국들(미국, 영국, 스위스, 독일, 일본 등)로 구성된 초기 파빌리온 구성으로 총 29개의 국가관 전시가 열리죠. 한국은 여기서 29번째 국가관으로, 이번에는 구정아 작가가 초청되었어요. 비엔날레의 원조인 베니스의 성공에는 90년대부터 변화한 국제 정세의 흐름이 주요했어요. 냉전 이후로 90년대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대가 열리던 시기였죠. 이런 흐름 속에 르네상스의 발원지이자 지중해 무역 상인의 국가 이탈리아답게(?), 주최 측은 국제 연대와 개방성을 추구하는 예술을 수용하며 그 변화와 혁신을 주도해 갔던 거에요. 비이탈리아계의 예술 감독을 선정하거나, 독일관의 대표 작가로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에게 황금사자상을 수여하는 등, 회마다 새로운 논쟁거리를 만드는 준비 과정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죠. 때로는 기상천외한 일화도 발생하구요. 그중에서도 한국관의 탄생 에피소드가 흥미로운데요. ‘여전히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은 어떻게 자르드니의 마지막 파빌리온이 될 수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으세요? 도시 전체가 문화재인 베니스에는 지금도 전시장을 함부로 짓거나 고칠 수 없어요. 그런데 당시 독일관의 작가로 참가한 백남준이 독일관과 일본관 사이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보고 한국관으로 점 찍었던 거에요한국 정부가 화장실 귀한 베니스에 공중화장실을 300개 기증하겠습니다!” 그의 발칙한 발상에서 시작한 각고의 노력은 결국 베니스 정부의 환심을 얻는데 성공하였죠. 1994년 7월, 23대1의 경쟁력을 뚫고 마침내 한국관이 건립하게 됩니다. 덧붙여 한국의 부동산 임대 사업 아이디어가 지금의 베니스 일대 전시 방식에 기여한다는 후설도 있는데요. 이런 에피소드는 정말 자국애를 한층 올려주는 것 같아요.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조상인 기자의 [인간 백남준을 만나다] 기사를 읽어 보시길요.)


어디에나 한국인은 있다

올해 본전시의 주제는 <Foreigners Everywhere>,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뜻인데요. 비엔날레 최초로 남미 출신의 아드리아노 페드로사(Adrianno Pedrosa)가 예술 총감독으로 선정되면서 비주류나 소수자로서의 ‘foreigner’를 입체적으로 해석한 전시를 선보였어요.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주변에는 항상 외국인이 있고 때로는 나 자신도 스스로에게 외국인이다”라는 감독의 인터뷰에서, 관객은 외국인의 의미가 이방인, 실향민, 망명자, 성소수자, 난민 예술가들과 같은 여러 층위를 주목하고 있단 걸 알 수 있죠. 본전시의 제목은 듀오로 활동하는 클레어 퐁텐(Claire Fontain)의 네온사인 작품에서 가져온 것이기도 해요. 아르세날레의 야외 선착장에 설치된 여러 언어로 번역된 문구가 가지각색의 색을 발광하는 작품은 무척이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웠어요. 전시 장소 선정도 탁월한 선택이였죠. 무역 항구인 선착장이야말로 어디에나 있지만 가깝고도 먼 외국인을 제일 먼저 만나는 장소니까요. 그러나 점멸하듯 빛을 발산하는 클레어 퐁텐의 60개로 번역된 언어들 가운데, 외국인은 어디에나 있다라고 적힌 한한국어가 없다면, 한편으로는 매우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전시였을 것 같아요. ‘모국어가 없거나 번역되지 않은 비주류 예술’에 대한 문제를 제도권의 미술 시스템에서 해소할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있으니까요. 이번 본전시에서는 변방의 작품을 많이 선보이면서도 유난히 보여주는 방식은 마치 대홍수가 휩쓸고 간 뒤 난파된 유물이 널려있듯이, 인종, 신분, 시대를 파악하기 어렵게 혼종적으로 연출하고자 한다는 인상이 강했어요. 그중 아르세날레의 유리 이젤 섹션은 탁월했어요. 미술관의 명화들을 꺼내 놓은 것처럼 캔버스 뒷면을 감상할 수 있게 특수 제작한 프레임에 작품들을 전시했거든요. 항상 작품의 앞면만을 감상할 수 밖에 없는 관객에게는 묘한 쾌감을 주는 디스플레이였죠. 유적지에서 막 건져 올린 유물들을 보는 기분도 들고요.


관람평은 각자의 몫이지만 전시 의도에 맞춰 꾸려진 본전시와 국가관 전시에는 ‘한국작가 여기 다 모아 놓았어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반가운 이름들이 즐비했어요. 월북 미술가 이쾌대(1913-1964), 월전 장우성(1912-2005), 한국 1세대 여성 작가 김윤신을 비롯해 <올해의 작가상 2023>에 선정된 이강승, 일상의 사물을 재료 삼아 고향에 얽힌 을 재현한 <구정아-오도라마 시티> 등이 본전시를 채웠죠. 그 외에도 광주비엔날레 30주년 기념 아카이브전 <마당-우리가 되는 곳>, 아르코미술관의 한국관 건립 30주년 <모든 섬은 산이다>가 오프-사이트에서 추가로 열렸어요. 1960-70년대 작품들로 구성된 <유영국: 무한 세계로의 여정>, <이성자: 지구 저편으로>, 이배, 이승택, 이강소, 이건용  실험적인 한국 현대미술들도 총출동했죠.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베니스의 테마가 한국인은 어디에나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죠. 


“아트라베시아모” 함께 건너자

전시 개막과 함께 글로벌 매체들은 매회 꼭 가봐야 할 파빌리온,’ ‘올해의 황금사자상 같은 헤드라인을 앞다투어 발신해요. 비엔날레가 자본주의 꽃이 된 현대미술의 시장 흐름을 전망하면서부터 미술 애호가나 기획자, 컬렉터는 작품 고르기에 더욱 바뻐지죠. 여행 중에 지인을 만날 새면 안부 인사 대신 어느 파빌리온이 좋았어요?”가 첫 인사에요. 그리고 동시에 모두가 놓치면 후회할 전시 목록을 새로 짜고 고치기를 반복하죠

2024년 황금사자상의 영예는 호주 원주민 출신의 아치 무어(Archie Moore) 작가와 뉴질랜드 마오리족 여성작가로 구성된 '마타호 컬렉티브(Mataaho Collective)'가 차지했어요. 개인적으로 마오리족의 전통 직소 기술을 활용해 물건을 나를 때 사용하는 카웨 운송 장치를 재해석한 작품은 여성의 노동을 연상시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었죠. 사실 본전시장 외에도 입이 쩍 벌어지는 스펙타클한 오프-사이트 파빌리온에서도 정말 많이 열렸는데요. 그중에서도 저는 아래 세 개의 전시를 베니스에 간다면 꼭 보아야 할 전시로 추천하고 싶어요. 예술과 자본의 공생관계를 자명하게 보여주면서도, 인간의 폭력과 부조리, 비인간성이 사라진 소리 없는 절망을 온전히 전달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첫 번째는 피노 컬렉션의 베니스 전시장 중 하나인 푼타 델라 고나에서 열리는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전시에요. 압도적인 영상 스케일들 선보이는 <리미널(Liminal)>의 얼굴 없는 인간 형상과 폐허가 된 후쿠시마에 소녀 가면을 쓴 원숭이 영상 <휴먼 마스크(Human Mask)>, 브랑쿠시의 <잠자는 뮤즈>를 등에 엎고 어항 속을 거니는 실제 소라게는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작가는 AI 시대를 맞으며 눈 앞에 펼쳐질 인류의 재앙을 절망과 공허, 우주에 난파된 인간의 무기력함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죠. 또 다른 전시는 폴란드관의 우크라이나 예술 집단이 만든 “나를 따라 말해 보세요(Repeat After me)”라는 상영물이에요. 실제 난민들의 인터뷰한 영상 앞에는 마이크가 관람객을 향해 설치돼 있고, 영상 속 인물은 직접 겪은 전쟁의 공포를 기억하며 그 총탄 소리를 입으로 재현해요. “hhhHM~” 관객은 그들을 따라 소리내고, 그 울림은 공간을 가득 메우는 거죠. 전쟁의 상흔을 눈이 아닌 귀로 듣고 같이 내뱉는 순간 결국 저도 모르게 울컥할 수 밖에 없었죠. 이런 단순한 장치만으로 함께 하자는 메시지를 뿜어낼 수 있다니. 한국도 전쟁을 겪은 나라지만 어느덧 그 현실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살고 있단 생각에 안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수반한 전시였어요


마지막으로 오프-사이트로 열린 <우크라이나로부터: 감히 꿈꾸다(From Ukraine: Dare to Dream)> 추천해요. 멋진 휴양지에서 전쟁을 떠올리고 싶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꼭 연관 짓지 않고도 큐레이션한 건축 공간을 함께 즐길 수 있죠. 전시는 지구의 생태학적 재앙을 다루면서도, 우크라이나의 강제 이주와 난민의 문제를 시적이면서 강렬하게 포착한 작업이었어요. 롱테이크로 찍은 아이들의 잠자는 모습, 건물의 폭파 장면을 마치 순간 정지를 시킨 듯한 대형 라이트 박스 사진의 몰입감은 대단했어요.


“아트라베시아모!” 앞서 언급한 영화 속 리즈의 마지막 대사로 우리 함께 건너자란 뜻이에요. 이번 베니스의 여행은 맛있는 음식으로 먼저 공허한 허기를 달래고, 함께 한 동료들과 예술이 가진 메시지를 읊으며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순례지가 되었죠. 시원한 소나기를 흠뻑 맞은 기분이랄까요. 함께 건너자는 말이 소원해졌던 예술과 저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주술이었던 것 같아요. 


혼자가 아니에요. 함께 건너요.’ 저에게 가장 예술적인 메시지를 선물해 준 베니스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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