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 3
Keiji Yano

눈으로 듣는 음악, 아트북이 된 악보

2024.10.11

"소리를 내는 건 연주자의 몫이지만, 듣는 이의 감정이나 상상으로 소리의 모양과 분위기는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야노 케이지


첼로 연주자이자 콘텐츠 마케터인 선민입니다. 저는 늘 전시장과 책에서 음악의 흔적을 찾아다닙니다. 공간에 울려 퍼지는 소리와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텍스트나 작품 속에서 리듬과 운율을 발견하곤 하죠. 작년 이맘때쯤, ‘타이포그래피와 소리’라는 주제로 문자와 소리, 시각과 청각, 사물과 신체를 연결한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전시가 열렸어요. 소리가 문자로 변환된 흥미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전시를 찾았죠.


전시를 관람하던 중, 길게 펼쳐진 악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마림바 소리의 울림을 시각적으로 풀어낸 악보였는데, 음의 높낮이와 강약을 도형으로 표현한 독특한 방식이었죠. 마치 눈으로 듣는 새로운 음악 감상법을 제안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음표를 대신한 도형들은 마치 기억 속 희미하게 남아있는 풍경처럼 보였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활동 중인 디자이너 야노 케이지(Keiji Yano)의 〈Score & Shapes〉라는 작업으로, 그가 직접 레코딩한 마림바 음원과 함께 전시되었어요.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연주자인 그가 만든 이 독특한 악보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CC NOW 여덟 번째 이야기로 케이지 씨와의 인터뷰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from 콘텐츠 마케터 선민


눈으로 듣는 음악, 아트북이 된 악보

야노 케이지(Keiji Yano) l 일본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래픽 디자이너 야노 케이지는, 자신만의 디자인 규칙과 실험 방식을 통해 시각예술의 경험을 확장시키고 있어요. 마림바*를 연주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음악과 공명한 내면의 풍경을 악보로 만드는 〈Score & Shapes〉 작업을 선보이고 있어요.

*마림바(Marimba) 나무로 된 건반들이 피아노와 같은 방식으로 배열된 타악기. 말렛(mallet)으로 건반을 쳐서 소리 내며, 공명관을 통해 소리가 전달한다. 마림바는 실로폰으로 분류되지만, 음역이 더 넓고 울림이 더 풍부한 악기로, 아이폰 기본 벨소리를 연주한 악기로 알려져 있다.


〈Score & Shapes〉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악보를 아트북처럼 만드신 점이 흥미로웠어요. 독자분들께 프로젝트 소개를 부탁드려요.

케이지 KEIJIㅣ〈Score & Shapes〉는 대학 시절 북디자인 수업에서 처음 제작하기 시작했어요. 소리의 모양을 도형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이죠. 당시에는 마림바 연주곡이자 일본 동요 변주곡인 〈Variations on Japanese Children's Song〉을 주제로 마림바의 음역대를 시각으로 표현한 책을 제작했어요. 그때부터 소리를 들었을 때 연상되는 느낌을 도형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고안했고, 2019년에 현재의 〈Score & Shapes〉 작업의 형태로 다시 선보였죠. 


오랫동안 발전시킨 프로젝트였군요. 처음 작업을 접했을 때 마림바라는 특정 악기를 주제로 한 작업이라 더 희소성이 느껴졌어요. 마림바는 비교적 현대사가 짧은 악기고, 취미로 배우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요. 언제부터 마림바를 연주했나요? 

케이지 KEIJIㅣ마림바는 중학교 때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관악부에 들어갔거든요. 당시 드럼에 대한 동경이 있어 지원했는데, 친구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죠. 자연스럽게 건반 타악기인 마림바 앞에 서는 날이 많아졌고, 점차 그 매력에 빠지게 되었어요.


2019년에 선보인 작업 〈Variations on Japanese Children's Song〉는 일본의 마림바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아베 케이코(Keiko Abe)씨가 만든 곡이죠.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말렛(스틱)이 있을 정도로 마림바 현대사에서 주요한 인물이고요. 마림바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 아베 케이코 씨의 영향도 있었을까요? 

케이지 KEIJIㅣ물론이죠. 아베 케이코 선생님은 40년 동안 5옥타브 마림바를 개발하시고 수많은 곡을 작곡했을 만큼 악기에 인생을 바친 분이에요. 저를 포함해 선생님의 연주를 듣고 마림바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 많을 겁니다. 대학 시절에 케이코 선생님이 주최하는 음악 캠프에 참가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는 〈Score & Shapes〉의 주제 음악이었던 〈Variations on Japanese Children's Song〉을 연주했어요. 레슨 중에 아베 선생님의 소리와 제 소리가 겹친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의 전율이 아직도 생생해요. 깊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소리였거든요. 피아노나 바이올린에 비해 마림바의 역사는 짧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발전 중인 악기예요. 선생님과 동시대를 함께 한다는 건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죠.


그런데 마림바 연주자가 아닌 디자이너의 길을 선택했어요.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궁금해요.

케이지 KEIJIㅣ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제 전문 분야를 정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디자인에도 흥미가 생겼던 시점이라, 음악과와 디자인과 둘 중에 고민하게 되었죠. 한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일본 음대 입시는 굉장히 어려워요. 고민하던 중 음악 선생님께서 연주자로 살아갈 자신이 있겠냐고 물으셨고, 빼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연주자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음악은 취미로 하기로 결정했죠.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본인의 이야기로 마음이 움직였다면, 음악을 전공하지 않는 게 낫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그만큼 연주자로 살아남는 길이 험난하다는 뜻이죠. 선택에 후회는 없었지만, 방과 후엔 항상 마림바를 연습했어요. 지금도 가끔씩 레슨을 받으러 갈 만큼 마림바가 좋아요. 


음악을 했던 경험이 케이지 씨 작업에 차별점으로 나타나요. 악보 표기법인 이음줄, 붙임줄과 같은 선적인 요소나, 에코와 같이 소리의 울림을 표현한 기존 작업이 눈에 띕니다. 악보에 표기된 기호들의 실제 기능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작업할 때 음악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인가요?

케이지 KEIJIㅣ클래식 음악에서 사용하는 오선지의 규칙이나 현대 음악에서 영향을 받아요. 악보뿐만 아니라 악기의 실루엣도 좋아해서,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디자인을 추구하죠. 이음줄을 키 디자인으로 작업한 〈Bridge Score〉는 악보 출판사의 로고를 만드는 프로젝트였어요. 로고 자체에서 음악이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작업했죠. 


무대 위에 서는 연주자로 꾸준히 활동하는 건 어려운 일이죠. 연주 홀에 서 있는 건 아니지만, 케이지 씨도 프로젝트에 필요한 음원을 직접 녹음하고 있잖아요. 녹음할 만큼의 연주력을 유지한다는 건 대단한 일인 걸요? 

케이지 KEIJIㅣ사실 저도 레코딩은 처음이었어요. 〈Rhythm Song〉을 작업을 위해 처음으로 레코딩에 특화된 연습을 진행해 봤죠. 녹음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긴장한 채로 연습하고, 무제한으로 녹음을 할 수 없으니 연습 횟수를 제한하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죠. 부족함이 느껴지지만, 끝까지 서포트해 주신 마림바 연주자 미야노시타 시류(Shiryu Miyanoshita) 선생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소리의 모양을 도형으로 변환시키기 위해서 연습과 소리 연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을 것 같아요. 〈Score & Shapes〉의 작업 방법이 궁금해요.  

케이지 KEIJIㅣ우선, 이 작업을 통해 소리를 시각화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악보에 담고 싶었어요. 연주자가 무대에 서는 시간은 찰나이지만, 그걸 위해 준비하는 시간의 밀도는 아주 높죠. 그래서 실제로 무대를 준비하는 연주자처럼 마림바 연습과 도안 제작에 번갈아 가며 시간을 쏟았어요. 정밀 조정이 어려운 아날로그 인쇄 기법 리소 프린팅으로 악보를 제작한 이유도 무대 위에 올라간 연주자의 현장성과 즉시성을 표현하기 위함이고요. 기존 음악의 작곡가가 악보에 적어두었던 음계나 소리를 발음하는 아티큘레이션 등을 최대한 살리면서, 소리와 음악에서 연상되었던 풍경을 악보 위에 그리려고 노력했어요. 도안을 그릴 땐 전체 그림을 볼 수 없지만, 작업이 끝난 이후엔 그래픽으로 풍경화가 그려졌다는 느낌을 받아요. 


소리의 모양을 떠올렸더니 자연스럽게 풍경이 그려졌다는 말씀이군요. 

케이지 KEIJIㅣ맞아요. 〈Variations on Japanese Children's Song〉은 어린 시절 자주 듣던 동요의 멜로디가 변주되는 곡이에요. 처음 작업했을 때 의도하지 않았지만, 악보에서 고향 카가와 바다에 떠오른 섬의 풍경이 보였어요.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풍경 묘사에 저도 놀랐고요.(웃음) 제게 소리의 모양을 떠올린다는 건 단순히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악보를 그리기 위함이 아니라, 소리와 연결된 기억 속 풍경을 다시 상상하는 작업이에요. 2023년에 선보인 〈Rythm Song〉은 테크닉이 복잡하고 빠른 곡인 만큼 음의 울림이 오래 지속되어 자연스럽게 ‘멀리서’라는 뜻의 Distantly라는 단어와 잔잔한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파도 없는 바다가 떠올랐죠. 영국의 Stanage Edge의 풍경을 상상하며 작업했어요.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소리의 모양'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케이지 씨의 작업에 기초가 되는 개념 이해를 도울 방법이 있을까요? 

케이지 KEIJIㅣ충분히 생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제 작업은 시각물이니까요. ‘소리의 모양’이라는 개념이 어색하다면, 음악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장면을 먼저 떠올려 보는 것을 추천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풍경이나, 장면이 그려질 거예요. 소리를 내는 건 연주자의 몫이지만, 듣는 이의 감정이나 상상으로 소리의 모양과 분위기는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정해진 답변과 형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에요.


악보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책이잖아요. 누가 펼쳐도 작곡가의 의도를 읽어 연주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Score & Shapes>는 연주를 위해 제작된 건 아니지만, 기존 악보의 요소인 음표, 빠르기말, 악상과 같은 규칙이 읽혀요. 

케이지 KEIJIㅣ연주를 위한 악보는 아니지만,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죠. 악보의 키 컬러는 원곡에서 느껴지는 계절감이나 온도를 상상하며 정하고, 소리의 울림은 그라데이션으로 표현했어요. 연주했을 때 느꼈던 소리의 울림과, 레슨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던 피드백을 떠올리며 작업했어요. 테크닉이 어려우면,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가면서 물 흐르듯 넘어가지 못하고 자꾸 어려운 부분을 강조하게 돼요. 음을 하나씩 내려고 하지 말고 기계적으로 연주하라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렸을 때 작업이 풀렸던 기억이 있어요.(웃음). 


악보를 구성하고 있는 규칙들에 관해 설명해 주세요. 

케이지 KEIJIㅣ〈Rhythm Song〉으로 예를 들어보자면, 빠르기의 변화가 크지 않은 곡이기 때문에 템포는 일정한 간격의 동그라미 도형으로 표현하고 리듬이나 멜로디의 변화를 나타낼 땐 다른 색의 원을 덧대어 그렸어요. 또, 음의 크기는 불투명도로 표현해, 피아니시모(pp)는 불투명도 20%, 포르티시모(ff )는 불투명도 100%로 설정했고요. 울림이 깊고 오래 지속되는 저음은 포물선을 그려 소리를 표현했어요. 완성된 악보를 보았을 때 곡 자체가 충분히 표현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는 제가 세워둔 규칙을 다시 점검해서 새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Score & Shapes〉 작업은 기존 악보의 판형과 동일한 형태로 제작되었어요. 책이라는 매체가 작업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케이지 KEIJIㅣ프로젝트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악보를 그림으로 재해석하고자 했기 때문에 책의 형태를 빌려 오는 건 당연했어요. 소리와 음악을 ‘눈으로 들을 수 있는 악보’로 만드는 것이 작업의 첫 번째 목적이었으니, 지금까지 책으로 만든 작업의 형태는 적합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작품의 형태도 언제든 변하잖아요. 추후 더 확장된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르죠.(웃음) 곡이나 전시 공간에 맞추어 가장 적합한 형태의 악보를 만들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음악을 눈으로 듣는 방법을 제안한 〈Score & Shapes〉 프로젝트의 앞으로가 궁금해요. 

케이지 KEIJIㅣ사실 저는 악보 읽는 것이 굉장히 서툴러요. 프로 음악가도 아니고, 악보 읽는 속도도 느립니다. 마림바는 악기가 너무 커서 몸이 기억할 때까지 반복해서 연습해야만 하죠. 뭐든 손에 익으면 즐겁지만, 그전까진 너무 괴로워요.(웃음) 그럼에도 악보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이나, 음악을 다른 방식으로 듣고 싶은 사람이 제가 만든 악보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면, 그건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만든 작품들은 제가 직접 연주 경험이 있는 곡들을 선택했었는데, 다음에는 클래식 피아노 연주곡으로 도전해 볼 예정이에요. 연주할 수 없는 곡이기 때문에 접근 방식도 달라질 것 같아, 지금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기대가 돼요. 이 프로젝트는 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창구이기 때문에 5년, 10년 후에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이미지 타이포잔치, 야노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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