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정원, 꿈과 시를 품다
2024.12.13
"작품을 통해 건축과 역사, 그리고 도시 간의 대화를 만들어내고 싶어요."
-장-미셸 오토니엘, 북토크 대담에서 발췌
정원을 뜻하는 영어 단어 ‘garden’은 히브리어에서 울타리를 의미하는 gan과 즐거움과 기쁨을 뜻하는 oden의 합성어라는사실, 알고 계셨나요? 동서양 문화를 막론하고 정원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기쁨과 평온함이 깃든 공간으로 자리해 왔습니다. 특히 도심 속 정원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여유를 찾고 숨을 고를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죠.
이번 CC NOW 열한 번째 이야기에서는 『장-미셸 오토니엘: JEAN-MICHEL OTHONIEL』 출간을 기념하여 열린 북토크를 통해 그의 지난 30여 년간의 작품 세계와 정원 이야기를 조명합니다. 이번 대담에는 이 책의 서문을 작성한 황주영 조경사 연구자와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린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전시를 기획한 방소연 학예사가 함께했는데요. 특히, 덕수궁 연못에 황금 연꽃을 피워낸 오토니엘의 예술적 관찰과 이 장소가 가진 역사적 배경을 다룬 이야기는 한국 정원이 품은 시대적 의미와 예술적 해석을 깊이 있게 전해주었습니다. 현장에 참여하지 못한 구독자분들은 이번 뉴스레터를 통해 장-미셸 오토니엘이 전하는 전시와 출판, 그리고 그의 예술적 세계를 함께 경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from 콘텐츠 마케터 선민
예술가의 정원, 꿈과 시를 품다
방소연ㅣ안녕하세요, 장-미셸 오토니엘 작가의 북토크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한 《장-미셸 오토니엘: 정원과 정원》 전시를 기념하며 출간한 이안북스의 『장-미셸 오토니엘: JEAN-MICHEL OTHONIEL』 작품집을 소개하는 행사로 마련되었습니다. 먼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최되었던 전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게요. 지난 2022년 시립미술관 전시는 파리 쁘띠 팔레(Petit Palais)에서 진행되었던 오토니엘의 개인전을 한국적인 장소와 맥락에 맞추어 변형한 기획이었죠. 대부분 같은 작품들로 구성되었지만 전혀 다른 인상으로 다가왔는데요.
오토니엘ㅣ그렇습니다. 파리 쁘띠 팔레에서 선보였던 작품이지만, 두 전시를 별개의 프로젝트로 준비했어요. 두 정원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장소였거든요. 파리의 정원은 섬세하게 가꾸어 놓은 공간이라면, 덕수궁 정원은 궁전 안에 위치해 자연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된 느낌이었어요. 역사적으로 보아도 파리의 정원은 19세기에 조성된 반면에 덕수궁은 왕조 시대부터 존재했죠.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접근한 전시였어요.
오히려 덕수궁에 설치한 작업은 제가 베르사유에서 선보인 ⟨Les Belles Danses⟩와 공명하는 점이 많다고 느껴요. 베르사유는 루이 14세가 거주했던 공간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억압받던 시기와도 맞물리는 곳이었기 때문이죠.
방소연ㅣ전시의 배경이 된 덕수궁은 경복궁이나 창경궁, 경희궁 같은 한국의 다른 궁궐과 구분되는 독특한 지점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황주영ㅣ덕수궁은 역사 사적지인 동시에 도시공원의 역할을 하는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서울의 5대 왕궁 중에서도 시민들에게 가장 가깝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죠. 저 역시 작품집의 서문을 준비하면서, 덕수궁이라는 장소가 우리 한국의 근현대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어요. 특히, 오토니엘의 연꽃 작품이 설치되었던 덕수궁 못은 자료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특하고, 다른 궁궐의 전통적인 못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지니고 있어요. 심지어 이름조차 없는 이 연못을 자꾸 들여다보니 우리 역사가 가진 상흔이 느껴지더군요. 대한제국 시절, 덕수궁에 있던 여러 전각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어요. 이후 지금의 시청 광장 자리까지 확장되어 있던 큰 못도 도시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축소되었죠. 수차례 형태가 바뀌어 이 못은, 우리 역사의 일면이 함축적으로 담긴 공간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오토니엘의 작업이 다양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여러 모습으로 발하는 것을 보며, 저는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되었죠.
방소연ㅣ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토니엘의 작품은 전시 기간 동안 덕수궁과 서울시립미술관 두 곳에 설치됐었는데요. 서로 동떨어진 두 공간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를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오토니엘ㅣ미술관과 그 일대를 하나의 거대한 정원으로 만들고자 했어요. 덕수궁 연못과 미술관이 유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동선을 설계했죠. 덕수궁 못에는 ⟨황금 연꽃⟩을 심어 두었고, 전시장에는 ⟨푸른 강⟩을 설치했어요. 마치 관객들이 산책을 하듯, 직접 걸음을 옮기며 익숙했던 장소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방소연ㅣ맞습니다. 덕수궁 연못에는 ⟨황금 장미⟩, ⟨황금 연꽃⟩, ⟨황금 목걸이⟩가 설치되었어요. 장미는 서양 문명에서 자주 등장하고, 연꽃은 아시아 문화에 역사 깊은 식물이죠. 조경사 연구자로서 장미와 연꽃의 만남을 어떻게 보셨나요?
황주영ㅣ정원에는 많은 식물이 있지만, 특히 어떤 식물의 존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곤 해요. 예를 들어, 아랍 국가에서는 정원을 ‘굴샨’ 이라고 부르는데, ‘굴’은 장미를 뜻합니다. 장미는 정원에서 보편적인 식물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어요. 비슷하게 우리 정원 속 연못의 ‘연’ 역시 연꽃과 연관이 있습니다. 오토니엘의 작업에서 꽃이 자주 등장하는데, 저는 그 꽃이 새로운 문화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생각해요. 덕수궁 못에 연꽃과 장미가 함께 피어나면서 우리나라와 서양 문명의 아름다움이 공존하게 된 것이죠.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인 『양화소록』에 따르면, 연꽃은 씨앗의 끝을 살짝 갈아 상처를 내어야만 싹이 튼다고 해요. 이를 통해, 시련과 고통의 끝에 비로소 꽃이 피어난다고 해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알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덕수궁 위에 핀 연꽃을 바라보며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깊은 울림이 있었어요.
방소연ㅣ한번 여기서 작가님께 여쭤볼까요(웃음). 혹시 연꽃이 싹을 피울 때 씨앗을 갈아야 한다는 걸 아셨나요?
오토니엘ㅣ몰랐습니다(다 같이 웃음).
방소연ㅣ본전시 준비를 위해 겨울 즈음 덕수궁을 방문했는데, 당시엔 삭막한 기운이 돌아 걱정되었어요. 그런데 막상 여름에 전시를 여니 생각하지 못한 마법 같은 요소가 있었죠.
오토니엘ㅣ작품을 처음 설치하러 갔을 때, 수면이 초록빛 연꽃잎으로 뒤덮여 물의 표면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물과 작품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효과를 기대했던 터라 다소 아쉬움이 남았죠. 그런데 전시 개관이 다가오면서 날씨가 따듯 해지고, 마법처럼 노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어요. 마치 자연이 전시에 화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죠. 연못 곳곳에 꿈을 심어두고 싶었던 저의 개인적인 바람이 마법처럼 구현된 순간이라 더욱 특별히 기억에 남아요.
방소연ㅣ노랑어리연꽃이었죠. 햇빛에 따라 꽃이 만개하기도 하고, 흐린 날에는 봉우리가 져서 더 생동감이 느껴졌어요. 이 노랑어리연꽃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나요?
황주영ㅣ노랑어리연꽃은 사실 저수지에 가면 많이 있습니다(웃음). 우리가 쉽게 지나쳤을 뿐이죠. 저도 이번 전시를 통해서 연못에 저런 마법을 부리는 꽃이 있다는 걸 배웠어요.
오토니엘ㅣ책의 서문을 작성해 주셨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인사드리네요. 혹시 건축가나 조경가가 아닌 예술가가 정원에 가져올 수 있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황주영ㅣ예술가가 정원을 만든다고 할 때 기대하는 건 아마도 꿈과 시가 아닐까요? 오토니엘의 정원 전시에는 그것들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이전까지 덕수궁에서 연못을 유심히 본 분들은 별로 없을 거예요. 하지만 오토니엘의 작품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면서, 그야말로 마법처럼 새로운 희망을 담은 꿈과 시가 연못에 담긴 거죠.
방소연ㅣ무척 공감이 가네요. 근래에 다음 프로젝트 준비로 굉장히 바쁘시다고 들었어요. 예정된 전시 소식도 소개 부탁드립니다.
오토니엘ㅣ총 세 가지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어요. 첫 번째는 브라질 상파울루 근처 쿠리치바(Curitiba)라는 도시에 개관을 앞둔 미술관에서 열리는 ⟪O Olho da Noite⟫ 전시입니다. 건물 내부를 천체 박물관처럼 구성해서 마치 작품이 별자리처럼 보이도록 전시할 예정이에요. 이 미술관의 건축은 브라질 최고의 건축가로 손꼽히는 오스카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가 맡았어요. 그도 저와 마찬가지로 꽃에서 주로 영감을 얻는데,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브라질에서만 자생하는 나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해요. 박물관 규모에 맞추다 보니 상당히 대규모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중국 상하이에서 첫 번째로 선보이는 개인전이에요. 전부 콘크리트로 지어진, 브루탈리즘이 느껴지는 건축물에서 그동안 진행했던 작업을 선보이는 회고전이 될 거예요.
마지막 프로젝트는 규모가 상당한데요. 아비뇽 연극제 25주년을 맞이해, 프랑스 남부 아비뇽(Avignon) 지역의 도심 주요 미술관 10곳을 순회하며 관람하는 형식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메인 전시 공간은 교황이 궁전으로 사용했던 건물로, 대략 2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될 예정입니다. 무척 역동적인 한 해가 될 것 같아요(웃음).
방소연ㅣ연달아 진행되는 프로젝트들로 정말 바쁘시겠어요. 앞으로 진행될 전시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청중 질의응답으로 북토크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청중1ㅣ안녕하세요, 늘 자연과 하나 되는 매력적인 작품들을 만드시는데요. 주로 어디에서 영감을 얻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오토니엘ㅣ대체로 영감은 자연이나 역사에서 얻어요. 지금까지의 모든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앞서 소개한 세 개의 전시에서도 작품을 통해 건축과 역사, 그리고 도시 간의 대화를 만들어내고 싶어요. 내년에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아비뇽 지역은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사랑에 관한 연작을 쓴 도시로도 유명해요. 이를 계기로 그를 동경하던 많은 시인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되었죠. 이번 프로젝트는 그의 시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해요. 미술관을 투어하면서 그의 시를 따라가는 동선을 경험하도록 기획했어요.
청중2ㅣ정말 다양한 장소에서 작업을 선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같은 작업이라도 장소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바뀐다고 생각하시나요?
오토니엘ㅣ동일한 작품이어도 문화권에 따라 새롭게 해석된다는 점이 늘 흥미로워요. 특히 한국과 일본 관객들과 특별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걸 느낍니다. 그래서 늘 아시아권 관객들과의 만남이 기대가 되죠. 매번 색다른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이 하나의 기쁨이에요.
청중3ㅣ브라질인으로서 내년에 쿠리치바 프로젝트 소식을 들으니 무척 반갑네요. 작업을 볼 때마다 마치 작품이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전시가 진행되는 장소, 혹은 건축의 이야기를 대신해 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장소와 건축물이 가진 역사에 스며들어 작품으로 말을 건네는 게 의도된 바인지, 아니면 그 장소를 새롭게 보는 관점을 제안하는 것이 목적인지 궁금합니다.
오토니엘ㅣ복잡하면서도 흥미로운 질문이네요. 만약 건축물이 미술작품을 위해 지어질 경우, 장소를 해석함에 있어 더 어려울 때가 있어요. 공간을 벗어나는 것이 다소 제한적이랄까요? 반면에 역사가 그대로 보존된 공간에서 작업을 할 때는 자연스럽게 경이로움이 생기고, 그것이 곧 동력이 되기도 하죠. 축적된 역사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서 접근하고 있어요. 하지만 장소의 특색과는 관계없이 모든 작업은 늘 즐거워요.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문화를 배우면서 건축물과 제 작품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드는 것은 과정은 언제나 흥미롭죠. 앞으로의 전시도 기대해 주세요.